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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흰 구름 님에게 - 나태주

by 진규은규아빠 2025. 1. 30.

흰 구름 님에게

 

흰 구름 님. 지금 어디쯤 가고 계시는지요? 지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계시는지요? 한때는 나도 눈물 글썽이는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았고 가슴 가득 당신을 안고 싶어

안달한 적이 있었지요. 그렇지요. 그 시절엔 당신이 나의

애인이었고 누이였고 고향이었고 미지의 나라였고 사랑 그

자체였으니까요.

 

당신은 검고도 치렁한 머리칼을 가진 여자. 가까이 가면

그 머리칼에서 알싸한 양파 냄새가 번질 것도 같았었지요.

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멀리 아스라이 있는 사람. 내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도 커서 벅찬 사람. 팔을 뻗어

아무리 잡아보려고 애를 써도 손끝에 닿지 않는 사람.

다만 아쉬움. 다만 서러움. 다만 그리움.

 

당신을 만나면 들려주어야지, 마음속에 간직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가까이 만난 일이 없기에 한 번도 당신에게

들려드린 적이 없지요. 그러다 그러다가 그 이야기들

이제는 모두 사그라들고 조약돌로 부서지고 모래알이 되고

말았지요.

 

하지만 당신 만나 이야기하려고 했다고 해도 가슴이 뛰고

말을 더듬어 말을 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차라리

아주 가까이 만나지 못한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몰라요.

 

당신은 나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가르쳐주었어요. 흰 구름

되어 하늘 높이높이 떠서 흐르다가 먹구름 되어 가라앉고

안개구름 되어 흩어지기도 했지요. 주어진 모든 생명이

그러하고 사랑이 또 그렇다는 걸 묵언으로 보여주었지요.

 

그래요. 이제는 당신 가까이 만나지 않은 걸 애달파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으려고 그래요. 이만하면 되었다,

저만큼 당신 높이 떠서 흐르고 당신도 당신 바라보는

나로서 만족이지요. 당신 어디에 있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든지 마음의 평안을 빌어요.

 

나도 잠시 지구 위에서 평안하게 숨 쉬다가 당신 곁으로

가려고 그래요. 그때 당신 나 알은체 눈짓으로 인사해주고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 밀린 이야기들 들려주시기

바래요. 그러면 그때까지 부디 당신 안녕을 빌어요.

 
                                   -   ‘23년 가을 나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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