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 글

강의

by 진규은규아빠 2009. 12. 28.

I. 저자에 대하여

만남

자기계발이나 심리학 관련 서적에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죽음의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빅터 플랭클 박사이다. 물론 그가 유명한 이유는 단지 그곳에서 살아나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에겐 결국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근원적인 자유가 있음을 깨닫고 수용소에서 이 자유를 맘껏 누린 사람으로 더 유명하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 희망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저자의 프로필을 보면서 빅터 플랭클이 떠올랐다. 저자는 감옥에서 20년을 보낸 사람이다. 그것도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이었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20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니, 그리고 그런 사람이 다시 세상에 나와 강의를 하고 책을 쓰고 있다니. 내가 보기엔 빅터 플랭클 못지 않은 격한 인생을 산 사람 같았다.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감옥 안에서 그는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 상황이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 감옥에서는 세 권이상의 책을 갖고 있을 수가 없어, 더 오래도록 읽기 위해 고전 읽기를 시작했다는 그의 말이 가슴을 울린다. 이 책 '강의'는 저자의 그런 뼛 속 깊은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한 책이다.

약력
1941년 경남 밀양 출생
1963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숙명여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1988년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1989년 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
2006년 8월 정년퇴임
현재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석좌교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년)
엽서(1993년)
나무야 나무야 (1996년)
더불어 숲 1권 (1998년 6월)
더불어 숲 2권 (1998년 7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증보판 (1998년 8월)
더불어숲-개정판 합본 (2003년 4월)
신영복의 엽서 (2003년 12월)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년 12월)

역서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년)
사람아 아!사람아(1991년)
루쉰전(1992년)
중국역대시가선집(1994년)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1장 서문>

ü         우리의 대학 시절인 60년대는 참으로 절망적이었습니다. …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마저 갖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유일한 탈출구를 근대화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근대기획이 우리 사회의 목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미국 문화와 유럽 문화를 다투어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치장하려고 하였지요. 사회의 상층부에 속하는 대학 사회와 대학 문화가 당연히 더 적극적이었고 그런 점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지요. 우리의 의식을 지배했던 것이 근대화와 서구 문화였습니다 (16).

ü         내가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사회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7).

ü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21).

ü         먼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이르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회 변혁기의 사상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사회 변혁기는 사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담론이 주류를 이룹니다 (21).

ü         처음으로 고대국가가 건설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최대한의 담론이 쏟아져 나왔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도 이 시대의 사상가임은 물론입니다. 한 마디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 담론의 시대 그리고 거대 담론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22).

ü         우리가 걸어놓는 화두는 관계론입니다 (23).

ü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닌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23).

ü         근대 사회의 사회론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견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24).

ü         과거의 사상과 현대의 사상이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래는 오래된 과거라고 했습니다 (27).

ü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 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시공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입니다 (29).

ü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34).

ü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것입니다. 지에 대한 애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36).

ü         도는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서양의 철학과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7).

ü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 질서라는 의미는 이를 테면 시스템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장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이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자력장, 중력장, 전자장과 같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체계이며 질서입니다. 장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서로 조화 통일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조화 통일됨으로써 장이 되고 그래서 최고의 어떤 질서가 됩니다. ‘관계들의 총화입니다. 중요한 것은 장을 구성하는 개개의 부분은 부분이면서 동시에 총체성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 그런 점에서 장은 부분적 총체들의 복합체이며 개개의 부분이 곧 총체인 구조입니다 (38).

ü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장의 개념이 3차원의 공간적 개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생멸 유전이 이루어지는 4차원의 질서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학에서 자연이란무궁한 시공으로 열려 있는 질서입니다. 우주라는 개념도 우와 주의 복합적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는 물론 공간 개념입니다. 상하시방이 있는 유한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주는 고금왕래의 의미입니다. 시간적 개념입니다. 무궁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생기의 장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생성과 소멸이 통일되어 있는 질서입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생주이멸의 순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38).

ü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 삼재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43).

ü         동양 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와 도가의 견제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 노장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입니다. … 오만과 좌절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유가의 인본주의를 견제하고 그 좌절을 위로하는 종교적 역할을 도가가 맡고 있는 셈입니다 (43~4).

ü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47).

 

<2장 오래된 시와 언>

ü         <시경>은 동양고전의 입문입니다. …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 그것이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라는 데 있습니다 (52).

ü         민요로 보아 틀리지 않습니다. … 시의 정수는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2).

ü         원래 <시경>에 실려 있는 시들은 가시였다고 합니다. 악가지요. +노래+춤이었다고 전합니다. … 정의가 언이 되고 언이 부족하여 가가 되고 가가 부족하여 무가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말로도 부족하고 노래로도 부족해서 춤까지 더해 그 깊은 정한의 일단이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55).

ü         <시경>은 중국 사상과 문화의 모태가 되고 있습니다. …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56~7).

ü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61~2).

ü         시적 관점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 결코 즉물적이지 않습니다. … 한 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64~5).

ü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77).

ü         <초사>는 시는 물론 산문, 소설, 희곡에 이르기까지 중국 문학 전반에 광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78).

ü         굴원의 <이소> <초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힙니다. <이소>는 흔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에 비유되기도 하고 단테의 <신곡>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전쟁 영웅을 기리는 서사이기거나 인간 이성의 구법 여행을 표현한 작품이 아닙니다. 실연한 여인의 장편 서사시입니다 (78).

ü         중국 역사에서는 남과 북이 싸우면 언제나 남쪽이 집니다. … 그런데 유일하게 남방이 북방을 물리친 정권이 바로 현대 중국입니다 (83).

ü         마오쩌둥은 <초사>를 손에서 한시도 놓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 마오쩌둥 사상이 이러한 남방적 낭만주의가 갖는 자유로움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방과 낭만주의와 창조적 정신 영역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입니다.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84).

 

<3장 주역의 관계론>

ü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87).

ü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90).

ü         공자 이전 2500년은 점복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이후의 시기는 <주역>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시대입니다 (91).

ü         주역의 경은 8, 64괘와 괘사, 효사의 네 가지입니다 (91).

ü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101).

ü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 이것이 곧 서구의 존재론과는 다른 동양학의 관계론입니다.

ü         <주역>에서는 이 가운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102).

ü         우리의 선망의 적이 되고 있는 선두는 물론 스타의 자리입니다. 최고의 자리이지요. 그 자리는 모든 영광이 머리 위에 쏟아질 것같이 생각되지만 사실은 매우 힘든 자리입니다. 경쟁으로 인한 긴장이 가장 첨예하게 걸리는 곳이 선두이기 때문입니다. …. 그와 반대로 맨 꼴찌는 마음 편한 자리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아마 가장 철학적인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 그러나 그곳은 무엇을 도모하거나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후미진 공간이라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관계 맺기가 어려운 매우 적막한 처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주역>에서는 중간을 매우 좋은 자리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가장 힘 있는 자리로 칩니다 (103).

ü         <주역> 사상에서는 위보다 응을 더 중요한 개념으로 칩니다. 이를테면 의 개념이 개체 단위의 관계론이라면 의 개념은 개체와 개체가 이루어내는 관계론입니다 (104).

ü         위가 소유의 개념이라면 응은 덕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인간관계와 신뢰가 바로 응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5).

ü         <주역>은 변화에 관한 사상이고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107).

ü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107).

ü         <주역>은 글자 그대로 주나라 역사 경험의 총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나라 역시 그 이전의 여러 문화 사상의 총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역>과 주나라의 문화 사상은 이후 중국 문화와 동양적 사고의 기본 틀이 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107).

ü         혁명을 치르지 않은 나라가 진정한 발전을 이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혁명을 치르지 않은 사회가 두고두고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는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습니다 (110).

ü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이것은 천지의 법칙이다 (113).

ü         실패한 사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 즉 인간관계를 디딤돌로 하여 재기하는 것이지요 (127).

ü         최후의 괘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128).

ü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31).

ü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31).

ü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132).

 

<4. 논어, 인간 관계론의 보고>

ü         공자의 시대는 기원전 500년 춘추전국시대입니다. 5천년 중국 역사에서 꼭 중간으로, 중국 사상의 황금기인 소위 백화제방의 시대입니다 (137).

ü         사회 경제사적 의미에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크게 보아 춘추전국시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38).

n        첫째, 춘추전국시대는 철기의 발명으로 특정지어지는 기원전 5세기 제2농업혁명기에 해당됩니다. 이 시기는 철기시대 특유의 광범하고도 혁명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수공업, 상업의 발달로 이어집니다. 여불위 같은 대상인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적 가치가 붕괴되고 오직 부국강병이란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되는 시기입니다. 신자유주의와 무한 경쟁으로 질주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패권주의적 경쟁과 다르지 않습니다.

n        둘째,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구 사회절서가 붕괴되는 사회변동기입니다.

n        셋째,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의 백화제방의 시기입니다. 주 왕실이 무너지면서 왕실 관학을 담당하던 관료들이 민간으로 분산되어 지식인 계층을 형성하게 됩니다. … 패권 경쟁을 위한 정치 기구의 확충과 전문적 지식에 대한 요구가 커짐에 따라 정신 노동의 상품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입니다.

ü         사회에 대한 이 모든 개념은 제도와 인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제도와 인간이라는 두 개의 범주가 인간관계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사회는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라 할 수 있으며, 이 인간관계의 사회적 존재 형태가 사회 구성체의 본질을 규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인간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지요 (145).

ü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145).

ü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가는, 그야말로 물과 같다는 생각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로 시간이란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존재 형식일 따름이다. …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걸치는 옷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147).

ü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단절된 형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사유의 차원에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 실체에 의한 구분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입니다 (149).

ü         상품 미학에 이르면 미의 내용은 의미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디자인과 패션이 미의 본령이 되고 그 상품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은 주목되지 않습니다 (159).

ü         미는 글자 그대로 양자와 대자의 회의입니다. … 고대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양은 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 한마디로 양은 물질적 토대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양이 무럭무럭 크는 것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흐뭇한 마음, 안도의 마음이 바로 미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159).

ü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159).

ü         광고 카피가 약속하는 그 상품의 유용성이 소비 단계에서 허구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허구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디자인이 바뀌는 것이지요. 그리고 디자인의 부단한 변화로서의 패션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결국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이 상품미학의 핵심이 되는 것이지요 (159).

ü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구성 원리를 준비하고 있는 현장이라는 것이지요 (163).

ü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 나는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동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64).

ü         새로운 문명은 이 동의 논리와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165).

ü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대륙적 소화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불교, 유학, 마르크시즘, 자본주의 등 어느 경우든 더욱 교조화되는 경향을 보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동의 논리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화의 논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66).

ü         신체가 건강한 것보다는 마음 좋은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 루쉰이 의사 되기를 포기하고 문학으로 진로를 바꾼 이유가 그렇습니다 (167).

ü         미모의 기준을 외적인 형식미에 둘 경우 사흘이 안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변화 그 자체에 몰두하는 오늘의 상품미학에서 형식미는 더욱 덧없는 것이지요. 백범을 넘어서 그리고 루쉰을 넘어서서 이 마음의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마음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 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거나 좌우명으로 걸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의식 속에 녹아들어 있는 그러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7~8).

ü         자공은 호상으로, 공자의 주유에 동참하지 못함을 반성하여 공자 사후 6년을 수묘한 제자입니다. 그리고 공자 사후에 자신의 재산을 들여 공자 교단을 발전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그리하여 공자는 자공과 함께 부활했다고 하지요 (170).

ü         개인의 능력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 있으며 이 인간관계는 신뢰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지요 (171).

ü         인간적 잠재력과 인간성이 바로 인간관계의 소산인 것은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지요 (172).

ü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아는 것이 지라는 대단히 근본적인 담론을 공자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174).

ü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 다시 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법이지요.지와 애는 함께 이야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 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지라는 사실입니다.지는 지인이라는 의미를 칼같이 읽는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한 사회입니다 (174~5).

ü         진정한 지란 무지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가 참된 지라는 것이지요 (186).

ü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188).

ü         제갈공명의 명석한 판단은 무사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하를 도모하려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음은 물론, ‘윗사람이 되려고 하는 욕심마저도 없었지요. 이처럼 무사하기 때문에 공평할 수 있고 공평하기 때문에 이치가 밝아질 수 있는 법입니다 (188).

ü         중요한 것은 무욕과 무사를 설파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과를 불문하고 아무리 교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치장하더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명석합니다. … 타자의 시각이 정곡을 찌르는 법입니다 (188).

ü         만인으로부터 호감을 받는 경우와 만인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경우 둘 다 좋지 않다는 것이지요. 양극단은 실제로는 없는 것입니다 (192).

ü         상품 미학은 현대 사회의 문화적 본질입니다. 상품미학이란 상품의 표현 형식입니다. 상품이 잘 팔릴 수 있도록 디자인된 형식미입니다 (196).

ü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198).

ü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199).

ü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고전 강독의 관점에서 이를 규정한다면 낙은 관계의 최고 형태인 셈입니다 (200).

 

<5. 맹자의 의>

ü         공자가 춘추시대 사람이라면 맹자는 전국시대 사람입니다 (211).

ü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이 맹자에 의해서 의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한 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2).

ü         현자는 여민동락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점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즐거움과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행복의 조건 즉 낙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독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9).

ü         맹자는 그 사람의 사상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본성도 사회적 입장에 따라서 재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30).

ü         일상 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232).

ü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 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233).

ü         자본주의 사회란 사회의 일반적 부문에 있어서의 인간관계가 일회적인 화폐 관계로 획일화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일회적 화폐 관계가 전면화되고 있는 인간관계는 사실상 인간관계가 황폐화된 상태이며, 인간 관계가 소멸된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240~1).

ü         바다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 일월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243).

ü         불영과불행도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245).

ü         불성장부달역시 불영과불행과 같은 의미입니다. 장은 수많은 무늬들로 이루어진 한 폭의 비단과 같은 것입니다.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경지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않았으면 치인의 장으로 나아가면 안 되는 것이지요 (245).

ü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 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250).

 

<6. 노자의 도와 자연>

도는 자연을 본받습니다

ü         중국 사상은 지배 담론인 유가 사상과 비판 담론인 노장 사상이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동양 사상의 정체성은 <논어>보다는 오히려 <노자>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53).

ü         유가 사상은 서구 사상과 마찬가지로 의 사상입니다. 인문 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이 진의 내용이 됩니다.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하여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입니다. 노자의 귀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253~4).

ü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제자백가의 사상은 노자를 한 편으로 하고 여타의 모든 학파를 다른 한 편으로 하는 두 개의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자백가의 사상은 대체로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정책적 대응을 본령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노자는 다른 학파들의 주장과는 달리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반대합니다. 인위적 제도나 규제는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책이 되지 못하며 도리어 혼란과 불의를 가중시킬 뿐이라는 기본적 입장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254).

ü         제도와 문화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생성과 변화 발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부터 언어와 인식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노자는 철저하리만큼 근본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적이라는 의미는 인간과 문화와 자연에 대한 종래의 통념을 깨트리고 전혀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의 논리가 그것이지요. 여기서 법은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체계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254).

ü         <노자>의 체계에 있어서는 자연의 생성 변화가 곧 도의 내용입니다. 인위적 규제는 이러한 질서를 거역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254).

ü         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합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는 근본적으로 반 문화적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255).

ü         춘추전국시대는 결국 법가 사상에 의하여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진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 사상계의 통일도 당연히 뒤따르게 됩니다. … 그러나 통일의 주역인 법가 사상은 난세를 평정하는 과정에서는 대단한 역동성을 발휘했지만 치세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적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255).

ü         한 이후 유교가 관학으로 자리 잡음에 따라 제자백가의 사상은 이제 유가 사상에 흡수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리하여 유가 사상이 지배층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256).

ü         그러나 권력은 본질에 있어서 폭력적 지배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재앙으로 규정하고, 자연이라는 근본적 질서를 회복할 것과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주창하는 노자의 반문화 사상이 지배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256).

ü         <노자> 81 5,200여 자에 이릅니다. 상편은 도로 시작하고, 하편은 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게 됩니다 (258).

ü         대체로 기원전 350~200년 경의 집단 창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59).

ü         왕필의 노자주가 지금까지 <노자> 해석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 왕필이 주를 달았던 시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지>의 시대입니다. 조조, 유비, 제갈공명이 역사 무대를 누비던 시기이지요. … 이 시대는 또 하나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극상과 혼란의 시대였지요 (260).

ü         결론적으로 왕필은 거대하고 복잡한 명교 체제와 번망한 한대 경학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근본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욕망의 소종래와 명교의 소이연을 밝히는 참된 도를 추구했던 것이지요. 그것이 곧 무를 근본으로 하는 이무위본의 철학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왕필 철학의 기본입니다 (261).

ü         <노자>는 무위와 관조라는 동양적 사유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사상일 뿐 아니라 과학, 문화, 예술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262).

ü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는 제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의 의미는 무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264).

ü         무와 유는 둘 다 같은 것인데 이름만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무릇 차이란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267).

ü         도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그것은 최대한의 법칙성 즉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운동 법칙을 의미합니다 (269).

ü         명의 경우도 도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언어로 붙인 이름이 참된 이름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름이란 원래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란 그 실체를 옳게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개미에게 물어보면 개미라는 이름은 자기 이름이 아니지요. 더구나 개미라는 이름은, 개미라고 지칭되는 그 곤충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 사람들이 붙인 표지일 따름이지요. 사람들끼리의 약속, 즉 기호인 셈이지요. 한 마디로 언어의 한계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곳에 노자의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것이지요.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269).

ü         도의 세계는 언어를 초월하는 세계임은 물론이며, 인간의 사유를 초월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자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부분에 대한 인식이며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인식일 뿐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드러난 현상의 배후에 무가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동체이며 통일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70).

ü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270).

ü         <노자>의 제 1 장은 무와 유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관계론의 선언입니다. 무와 유는 그것에 접근하는 접근로에 따라서 구분될 수 있는 개념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을 초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입니다. … 도는 천지 만물의 생성과 그 자체를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근원적 법칙성입니다. 인간의 인식이 그것을 담아낼 수 없지요. 도리어 인간의 인식이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노자의 철학적 체계입니다. 도가 작용하여 만물이 생성 변화 발전하는 것 그것이 유입니다. …. 노자 철학을 물의 철학이라고 하는 까닭은 보이는 것 중에서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물이기 때문에 물의 비유로써 도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무의 세계든 유의 세계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한 세계입니다 (271).

 

인위는 거짓입니다

ü         다시 한 번 노자의 기본 사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위의 사상과 상대주의 사상입니다. 무위란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개입하거나 자연적인 질서를 깨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273).

ü         노자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대립적인 것은 없습니다. 상호 전화될 수 없는 고정 불변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 만물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호 전화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인 체계입니다 (273).

ü         노자 사상의 기조는 대체로 유가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 서 있습니다. 인의예지란 인위적인 것이며 그 인위적인 것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지요. 예악, 명분, 문물 등에 대한 반성과 반문화적 관점이 <노자> 전편을 일관하고 있습니다 (273).

ü         자연이야말로 최고, 최선, 최미의 모델이라는 것이 노자의 인식입니다. … 미와 선은 지역이나 시대에 갇혀 있는 사회적 개념입니다. 미와 선의 그러한 특성을 한 마디로 인위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기존의 인위적인 미와 인위적인 선에 길들여진 우리의 관념을 반성하자는 것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제 2장은 유가적 인식론과 실천론에 대한 반성입니다. 인식의 상투성을 반성하고, 나아가 실천 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인위적 작풍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입니다 (274).

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인위란 것이 곧 거짓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 거짓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자연을 속이는 것이지요. 개미라는 이름을 붙이고 곤충으로 분류하는 것이지요. 그 인식에 있어서 자연을 왜곡하여 거짓 인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산을 깎고 물을 막아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지요. 그 실천에 있어서 자연의 운동 법칙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위와 작위 그 자체가 바로 거짓인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거짓인 셈이지요 (274~5).

ü         어려움과 수월함, 긺과 짧음, 노래와 소리, 앞과 뒤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 간의 차이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못 됩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인위적인 개입이며 불필요한 차이의 생산이라는 것이지요. 차이의 생산이 곧 자연의 분열이며, 자연의 훼손이며 그것이 곧 인위라는 것이지요. … 있는 그대로의 상태, 즉 자연의 본성을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위적인 구분이 초래할 수 있는 혼란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75).

ü         인식에 있어서의 잘못된 인위적 관념을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실천에 있어서의 올바른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지요. … 성인은 마땅히 무위하고 무언할 것을 요구합니다 (275).

ü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 공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276).

ü         결론적으로 <노자> 2장은 인식론이며 실천론입니다. 그 인식에 있어서 분별지를 반성하고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마 선악의 구분처럼 천박한 인식은 없다고 합니다. OX식의 이분법적 사고도 저급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기존의 저급한 인식을 반성하자는 것이지요. 유무, 난이, 고저, 장단은 비교할 것이 아니지요.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미의식마저도 기존의 인위적 틀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지요 (276~7).

 

뼈를 튼튼히 해야

ü         노자가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는 매우 순박하고 자연스러운 질서입니다. 우선 현을 숭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현이란 무엇입니까? 지혜라고 해도 좋고 지식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우리가 습득하려고 하는 지식이나 지혜란 한 마디로 자연에 대한 2차적인 해석입니다. … 당연히 자연으로부터 일정하게 괴리된 것이 아닐 수 없지요. 이러한 것을 숭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278).

ü         정치경제학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정치학입니다 (280).

ü         노자는 백성들이 무지무욕하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무욕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 지금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 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단한 갈증에 목마른 상태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 상품 생산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라고 해야 합니다 (280~1).

ü         지식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 지식도 상품입니다. 상품으로 생산되고 상품으로 유통됩니다. 상품의 운동 원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비가 미덕이 되고 부단히 새로운 상품이 생산됩니다. … 시장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설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상품화된 거대한 시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언어도 상품이 됩니다. 지식의 도구인 언어 그 자체가 가장 이윤 폭이 큰 첨단 상품이 되고 있습니다. … 도무지 무욕할 수도 없고 무지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구조와 현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노자>의 현대적 재조명이라고 생각하지요 (281).

ü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무위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옷처럼 만물을 감싸 기르면서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혼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천하는 무사로써 얻을 수 있으며, 감히 천하를 앞지르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282).

ü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282).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ü         노자 철학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물로써 도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284).

n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 생명의 근원입니다.

n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다투어야 마땅한 일을 두고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도피주의나 투항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n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ü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 바다가 모든 강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289).

 

빔이 쓰임이 됩니다

ü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 따라서 유가 이로운 것은 무가 용이 되기 때문이다 (292).

ü         유의 배후로서의 무를 드러내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고 이 장의 의미입니다. 현상을 있게 하는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93).

ü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을 위하여 한 줄기 바람이 되리라무와 유가 절묘하게 융화되고 있는 것이 바람이라고 생각하지요 (294).

 

스스로를 신뢰하도록

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즉 태상의 정치는 백성들이 임금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임금이 백성들의 삶에 간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 최고의 정치는 무치라는 것이지요. 그 다음이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 다음이 두려운 임금입니다. … 그리고 두려운 임금보다 못한 임금이 바로 백성들이 업신여기는 임금입니다 (295).

ü         상호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다음 구절인 유혜 기귀언 공성사수 백성개위 아자연입니다 (296).

n        귀언은 물론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공성사수, 즉 일이 성취되더라도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기가 이룩한 일을 생색내지 않는 것 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해석은 귀언은 불언이나 무언이기보다는 오히려 불간섭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섭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이 성취되는 것이 중요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 구절인 백성개위 아자연입니다. 백성들이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임금을 믿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이지요. 무언과 불간섭은 노자 철학의 전제입니다 (296).

ü         다음으로는 자연에 관해서입니다. 노자의 자연은 Nature가 아닙니다. …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Self-so 정도가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며 다른 외부를 가지지 않은 존재입니다. 독립적 존재입니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상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항상적 존재입니다. 최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최대한의 개념이며 가장 안정적인 질서가 바로 노자의 자연입니다 (298).

ü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299).

ü         어떤 분야든 최고 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300).

ü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일체의 교와 형식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법까지도 미련없이 버리는 경지입니다 (301).

ü         대변약눌최고의 웅변은 더듬는 듯하다는 뜻입니다. 언은 항상 부족한 그릇입니다. 언어로는 그 뜻을 온전히 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301).

ü         언어는 소통의 수단입니다. 소통은 화자와 청자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 화자의 연상 세계와 청자의 그것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 정확한 의미의 소통은 차질을 빚게 됩니다. 말을 더듬고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화자가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언어란 불충분한 표현 수단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 될 수 있으면 언어를 적게, 그리고 느리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301~2).

 

진보란 단순화입니다

ü         노자의 이상국가론입니다. 규모가 작은 국가, soft-techonology, 반전 평화, 삶의 단순화 등이 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결승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입니다만 반드시 복고적 주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간디는 진보란 단순화이다라고 했습니다 (304).

ü         노자 사상은 마치 수학에서 0의 발견이 갖는 의미와 공헌을 중국 사상에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노자 사상은 장자, 열자 등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계승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유가 측에서도 <노자>를 계속 읽고 해석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노자 사상은 중국 사상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데 매우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304).

ü         노자의 철학은 귀본의 철학입니다. 본은 도이며 자연입니다. …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305).

 

<7: 장자의 소요>

ü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 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309).” … 이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는 장자 사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장자가 당시의 제자백가들을 일컫는 비유입니다. 교조에 묶인 굽은 선비들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와 같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도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일갈 합니다 (309).

ü         당시 제자백가는공동체의 문제 즉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음장자가 추구하는 문제는 더 근원적인 문제였습니다. 제도 개혁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310).

ü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른바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입니다. 개인을 지도, 감독, 보호하려는 일체의 행정적 또는 이념적 규제를 인위적 재앙으로 파악하였습니다 (310).

ü         장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장자> 1 <소요유>입니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는 보행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동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311).

ü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311).

ü         무한한 소요유의 추구를 표방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라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장자의 철학과 사회학의 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11).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

ü         노자는 도의 존재성을 전제합니다. 도를 모든 유의 근원적 존재로 상정하고 이 도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그 도와 함께 소요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314).

ü         장자는 노자의 상대주의 철학 사상에 주목하고 이를 계승하고 있지만 이를 심화해가는 과정에서 노자로부터 결정적으로 멀어져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세계, 정신의 자유로 옮겨갔다는 것이지요 (315).

ü         <장자>는 권력 그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사상으로 평가됩니다. … 장자 사상은 반체제적인 부정 철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체제 그 자체를 부정하는 체제 부정의 해방론이라는 평가가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316).

 

높이 나는 새가 먼 곳을 바라봅니다

ü         <장자>는 그 전편에 흐르는 유유자적하고 광활한 관점을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여기에 비하면 <논어> <맹자>의 세계는 지극히 상식적인 세계입니다. … 결국 그것은 답습의 논리이며, 기득권의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당 부분 복고적이기까지 하지요. 장자는 이 상식적 세계와 세속적 가치를 일갈하고 일소하고 초월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이러한 초월적 시각은 대단히 귀중한 것입니다 (317).

ü         내편 <소요유>에서 초월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초월이 바로 장자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관한 것입니다. 장자는 초월의 경지를 네 가지 단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317~8).

n        첫째 단계는 극히 현실적인 상식인이며 메추라기와 같이 국량이 좁은 사람을 말합니다.

n        둘째 단계는 송영자는 송나라 사상가로서 반전 평화주의자이며 특히 칭찬이나 모욕에 개의치 않고 초연했다고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칭찬받으려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초월하지 못한 단계에 있습니다.

n        세번째 단계로는 열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비행하다가 15일이면 돌아왔는데 그것은 보름마다 불어오는 바람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열자도 자유롭기는 하지만 아직도 바람이라는 외적 조건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n        넷째 단계가 장자가 절대 자유의 단계로 상정하고 있는 도와 함게 노니는 소요유의 단계입니다. 소요유의 단계에 이른 사람을 성인, 신인, 지인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신인, 지인은 <장자>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한 마디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기, 무공, 무명의 경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단계가 장자의 이른바 절대 자유의 경지입니다 (318).

ü         장자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는 도를 터득하여 이를 실천하는 노자의 경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무엇에도 거리낌없는 경지가 장자의 절대 자유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318).

ü         마르크스 이론의 가장 큰 공헌은 자본주의 체제를 과도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역사적 관점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란 이전의 다른 모든 체제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질 과도적인 체제라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규명한 것이지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에서 종말이란 그 어감과는 반대로 최고 단계를 의미합니다. 궁극적 귀착점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가 최후의 체제라는 것이지요. 역사의 방황이 끝나는 지점이지요. 뿐만 아니라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여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체제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318~9).

ü         장자는 약소국의 가혹한 현실에서 자신의 사상을 키워낸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 그렇기에 그가 생각한 1차적 가치는 생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 없는 질서보다는 생명 있는 무질서를 존중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반생명적인, 반자연적인 그리고 반인간적인 모든 구축적 질서를 해체하려는 것이 장자 사상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신의 자유입니다. ‘우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320).

ü         장자는 제자백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논리가 상대의 허점을 예리하게 찔러 사람들이 그와의 논쟁을 기피할 정도였다고 하였습니다. 유유자적한 장자 사상으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킬러의 이미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 문장이 교묘하고 세상과 인정을 추찰함이 뛰어나 당시의 석학들도 그 예봉을 꺽지 못했다고 전할 만큼 그의 수사학과 논리는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320).

 

이것과 저것 저것과 이것

ü         사물은 어느 것이나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적 관점에 서면 보지 못하고 주관적 관점에서만 본다 (321~2).

ü         생과 사, 사와 생 그리고 가와 불가, 불가와 가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는) 모순 관계에 있다. … 그러기에 성인은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고 하늘에 비추어 본다고 하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 (322).

ü         현실의 상대주의적 한계를 깨달아 사물의 한 면만을 보지 말고 하늘에 비추어 보고, 도의 중심에서 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322).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ü         인위로써 자연을 멸하지 말며, 고의로써 천성을 멸하지 말며, 명리로써 천성의 덕을 잃지 말라. 이를 삼가 지켜 잃지 않는 것을 일러 천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326).”

ü         한 마디로 인을 거부하고 천과 합일해야 한다는 것이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자연을 피하려는 둔천의 형벌이다. 천인합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천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 못하다 (327).”

ü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는 술독을 안고 노래했다는 일화가 수긍이 갑니다.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인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히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328).

 

부끄러워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

ü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기계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기계는 그 속성인 기계의 발명과 기사와 기심으로 인하여 인간을 소외시키기 때문입니다 (330).

ü         그러나 장자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미리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인간이 비인간화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331).

ü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은 삶이며,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고, 도가 되어야 하고,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332).

ü         여러분은 사람과 기계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주관적이라고 생각합니까? … 내가 기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이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한 포기 풀이 자라는 것을 보더라도 그 풀은 햇빛과 물과 토양과 잘 어울리며 살아갑니다. … 그러나 기계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일을 못합니다. 남이야 어떻든 철저하게 자기 식대로 합니다 (333).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하다

ü         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반성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미혹을 반성할 여지가 원척적으로 없어지는 것이지요 (335).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입니다

ü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 (글로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37).

ü         세상에서 도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형과 색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과 성일 뿐이다 (338).

 

빈 배

ü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343).

ü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343).

 

나비 꿈

ü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조금 전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물화라 한다 (345).

ü         장자를 몽접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나비 꿈때문입니다. 장자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장자의 나비 꿈은 두 개의 사실과 두 개의 꿈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매우 함축적인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장자가 꾸는 꿈이며 둘째는 나비가 꾸는 꿈입니다. 이 두 개의 꿈은 나비와 장자의 실재가 서로 침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9만리 장공을 날고 있는 붕새의 눈으로 보면 장주와 나비는 하나라는 것이지요. 장주와 나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개별적 사물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커다란 전체의 미미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지요. 개별적 사물과 그 개별적 상을 하나로 아우르는 깨달음이 바로 제물론입니다 (345).

ü         모든 물, 즉 사물은 운동합니다. 정지도 운동의 한 형태입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하는 동태적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입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요 .직접적 원인을 인이라 하고 간접적 원인을 연이라 한다면, 즉 친인소연이라 한다면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불교의 연기설이 모든 존재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해체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존재를 꽃으로 보는 화엄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347).

ü         불교의 연기설에 있어서 인과 과는 불일불이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가 아니면서도 둘이 아닌즉 서로 다르면서도 둘이 아니며 또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자의 제물과 물화의 관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인과 과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과와 인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347).

ü         모든 사물은 이이일의 관계, 다르면서도 같은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침투하는 것이지요. 장자의 나비 꿈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47).

ü         모임의 이름이 별 부스러기 회입니다. … 모든 존재는 별의 부스러기라는 것이지요. 달이든 별이든 북극성이든 은하계든 그리고 돌멩이 한 개,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별의 부스러기 아닌 것이 없습니다. 대폭발 이론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나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이 우주의 모든 물은 별의 부스러기라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그 이름에서 매우 무한한 관계성을 느낍니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불이성의 세계입니다 (347~8).

 

참다운 지식

ü         장자가 바야흐로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제자들이 장례를 후히 치르고 싶다고 했습니다. 장자가 그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널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옥으로 알며, 별을 구슬로 삼고, 세상 만물을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네. 이처럼 내 장례를 위하여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무엇을 또 더한단 말이냐? (354).

ü         <노자><장자>의 차이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것을 하나로 묶어서 이해하는 태도를 갖기 바랍니다 (354).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

ü         말은 뜻을 전하는 것인데,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 나도 이렇듯 그 말을 잊어버리는 사람을 만나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싶구나! (355~6).

ü         고기는 이를 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56~7).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ü         지금부터 함께 읽으려고 하는 <묵자>, <순자>, <한비자> 등은 비주류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가는 유가와 함께 당시에는 현학이었다고 합니다. … <순자>역시 유가라는 점에서 주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비자>는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법가를 대표하는 사상이빈다. 천하 통일을 주도한 사상이란 점에서 법가를 비주류라고 하기에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 <순자>, <한비자>가 중국 사상의 전체 흐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비주류에 속한다고 해야 합니다 (362).

ü         당시는 혁명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혁명적 상황에서 묵가는 통치 권력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좌파 조직의 좌파 사상이었으며 묵적이란 이름은 그것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65).

ü         유가가 주공을 모델로 했다면 묵가의 모델은 하나라의 우 임금입니다 (366).

ü         유가란 예를 번잡하게 하여 귀족들에게 기생하는 무리라는 것이 묵자의 유가관입니다. 우임금의 실천궁행을 모델로 삼은 것은 유가가 모델로 삼고 있는 주나라의 계급 사회가 아닌 하나라의 공동체 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366).

ü         현재의 통설은 묵자는 은나라 유민들의 나라인 송 출신으로 주 시대의 계급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반대하고 우 시대의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며 일생 동안 검은 옷을 입고 반전, 평화, 평등 사상을 주장하고 실천한 기층 민중 출신의 좌파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367~8).

ü         묵자 사상이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있지만 우리는 두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겠습니다. 겸애와 반전 평화를 묵자 사상의 핵심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370).

ü         아마 이러한 특징 때문에 전국시대, 그리고 진나라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묵가는 유가와 함께 가장 큰 세력을 떨칠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 됩니다. 가장 큰 학파는 유가와 묵가이며, 공자와 묵자의 제자들이 천하에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370).

ü         , 한 이래 사회적 격동기가 끝나고 토지 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지주 관료 중심의 신분 사회가 정착되면서 묵가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상하의 계층적 차별을 무시하는 평등주의 사상이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맹자는 이러한 겸애 사상을 비현실적이며 비인간적인 엄숙주의로 매도합니다 (371).

ü         2천년이 지난 후인 19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유교 사회의 붕괴와 때를 같이하여 재조명됩니다. 그래서 2천 년 만의 복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지요 (371).

ü         20세기 초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중국에 소개되면서 신청년운동과 함께 <묵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습니다. … 그러나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습니다. 제자백가 중 가장 위대한 경험론자, 평등론자로 평가받으면서도 하느님 사상과 비폭력 사상 때문에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적으로 간주됩니다. 한편 우파로부터는 세습과 상속을 반대하는 그이 평등사상 때문에 여전히 배척되는 기구한 운명을 다시 반복하게 됩니다 (371~2).

ü         공자가 춘추시대 말기의 사상가라면 묵자는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372).

ü         묵자는 혼란의 궁극적 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373).

ü         묵자의 겸은 유가의 별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별이야말로 공동체적 구조를 파괴하는 가장 근본적인 해악이라는 것이지요. 나와 남의 차별에서 시작하여 계급과 계급, 지역과 지역, 집단과 집단 간의 차별로 확대되는 것이지요 (376).

ü         전쟁에 대해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것을 정면에서 반대합니다. 전쟁은 수천수만의 사람을 살인하는 행위이며, 수많은 사람의 생업을 빼앗고, 불행의 구렁으로 떨어트리는 최대의 죄악입니다. 단 한 줌의 의로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따라서 비공, 즉 침략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사상이지요. 그런 점에서 반전 평화론이야말로 전국시대 최고의 사상이며 최상의 윤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379).

ü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이 곧 제나라와 진나라가 추구했던 부국강병의 과정을 반복한 것이 사실이지요 (383).

ü         묵자는 결코 일방적인 사랑이나 희생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맺고 있는 상호 관계를 강조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관계의 본질이라고 주장합니다 (394).

ü         묵자의 이러한 사상이 바로 천지가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납니다. 하느님 이외의 어떤 것도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묵자의 비명 사상입니다. … 비명이란 하늘이 정한 운명과 숙명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화복은 인간이 자초하는 것이며 결코 하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묵자는 하늘 이외의 모든 존재, 즉 부모, 학자, 군주는 법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394~5).

ü         묵가는 집단 자살이라는 매우 비장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396).

ü         묵가에 대해서 가장 신랄한 비판을 가한 사람은 맹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397).

ü         묵자에 대한 <장자>의 평가를 소개합니다: 실천 행위는 과도하였으며 절제는 지나치게 엄정하였다. … 노래하고 싶을 때 노래하지 말고, 울고 싶을 때 울지 말고, 즐거울 때 즐거워하지 말아야 한다면, 이런 묵가의 절제는 과연 인간의 본성과 맞는 것인가? 묵가의 원칙은 너무나 각박하다. 세상을 다스리는 왕도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묵자와 금활리의 뜻은 좋지만 실천은 잘못된 것이다. 스스로 고행을 자초하여 종아리에 살이 없고 정강이에 터럭이 없는 것으로 서로 경쟁을 벌이게 할 뿐이다. 사회를 어지럽히기에는 최상이요 다스리기에는 최하이다. 묵자는 천하에 참으로 좋은 인물이다. 이런 사람을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다 (399).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ü         순자는 대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 순자의 생몰 연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313~238년이 통설입니다. … 그의 학문적 권위나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여 남아 있는 자료는 매우 소략합니다. 그가 유가의 이단 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403~4).

ü         일반적으로 유학은 객관파와 주관파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 계통이 객관파로 분류되고,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 천리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다시 말하자면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맹자 계통이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404).

ü         순자는 예에 의한 통치를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주관파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404).

ü         순자의 예는 법의 의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를 법가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지요. … 법가 이론을 집대성한 한비자와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재상 이사가 순자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들이지요 (405).

ü         순자가 유가학파로부터 배척당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의 천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자의 천은 물리적 천입니다. 순자의 하늘은 그냥 하늘일뿐입니다. 인간 세상은 하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가의 정통적 천인 도덕천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405).

ü         순자는 인간의 능동적 참여를 천명합니다. 천이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실천적 노력이라는 것이지요 (408).

ü         하늘만을 하늘같이 바라보거나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능참, 즉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08~9).

ü         바로 이러한 점에서 노장의 입장과는 근본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지요. 인간의 적극 의지와 능동적 실천에 근거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연의 질서와 도로 돌아갈 것을 설파했던 노장과는 반대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지요 (409).

ü         천명을 전제하고 성선을 전제하는 맹자의 체계에서는 그 선한 본성을 돌아가고, 그 선한 가능성을 확충함으로써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성과 선단을 하늘로부터 이끌어낼 수 없는 순자로서는 당연히 능참이라는 적극적 참여가 요구되며, 교육이라는 외적 기능이 요구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논리 속에 순자의 소위 성악설이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12).

ü         결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성악설은 인성론이 아니라 순자의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교육론과 예론, 제도론을 전개하기 위한 근거로 구성된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413).

ü         순자의 성악설과 함께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가 있습니다. 맹자의 성선설이든 순자의 성악설이든 우리는 본성론 자체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선악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인간의 본성이란 과연 있는 것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선악 판단 이전의 것입니다 (414).

ü         인간의 본성은 DNA로 환원될 수 있으며 이 DNA 40억 년 전으로부터 어느 시점, 또는 장구한 기간에 걸쳐서 이루어진 물질이라는 것이지요. … DNA의 운동은 자기의 존속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개체의 존속과 개체를 넘어선 존속, 즉 생존과 유전과 번식이 유일한 운동 원리입니다. … 인간의 모든 욕망도 이 DNA의 존속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식욕과 성욕이 이 DNA의 활동인 것은 물론입니다 (414~5).

ü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담론 환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만나는 것이 바로 인간 본성 문제입니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것이지요. … 한 마디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인간 본성론 위에 구축하는 것이지요 (416).

ü         이러한 담론은 이기심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개인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대단히 철학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인간 본성을 이기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환경에 편승하여 재빠르게 신자유주의를 합리화하는 논리를 구성하는 것이지요 (416).

ü         <묵자>편에서 소개했습니다만 묵자는 인간 본성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것입니다. 묵자는 소염론에서 인간의 본성은 물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이론이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귀납적으로 구성한 개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416).

ü         순자의 이론 체계는 교육이라는 후천적 훈련과 예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하여 악한성을 교정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417).

ü         순자는 모든 가치 있는 문화적 소산은 인간 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인문 철학자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417).

 

<10. 법가와 천하 통일>

ü         법가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사상입니다. 법가는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고 최후의 6국을 통일했습니다. 다른 학파, 다른 사상에 비하여 그 사상의 현실 적합성이 실천적으로 검증된 학파인 셈이지요 (431).

ü         <한비자>는 여러분도 잘 아는 바와 같이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431).

ü         요컨대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법가의 현실 인식입니다 (433).

ü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은 이처럼 변화를 인정하고,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현실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33).

ü         군주의 절대 권력을 옹호하고, 군주는 은밀한 술수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불릴 정도로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이미지를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438).

ü         법가의 법은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핵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법가 비판의 출발점입니다 (442).

ü         군주권을 강화하는 법가 이론은 나름의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만이 전국시대의 혼란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43).

ü         한비자가 주장한 법의 기본 성격을 종합해보면 첫째, 법의 성문화, 둘째 전국적으로 공포된 공집법, 셋째, 전국적인 법의 통일성이라는 세 가지 요건이 그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444).

ü         이처럼 법가는 법 지상주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법이 지상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공개성, 공정성 그리고 개혁성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이 세 가지의 내용은 법가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서로 통일되어 있는 하나의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444).

ü         임금이 신하를 제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의 수단이 있을 뿐이다. 두 가지 수단이란 형과 덕이다 (446).

ü         이러한 강력한 중앙 권력을 창출하기 위해서 한비자는 관료제를 주장합니다. …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관료제란 사사로운 통치 방식을 지양하는, 이를테면 제도와 조직을 통한 통치 방식이라는 사실입니다 (448).

ü         우리가 법가 사상에서 적극적 의미로 읽어야 하는 것은 개혁성과 법치주의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상에 비하여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법가의 특징입니다. … 이 새로운 공간은 일차적으로 과거의 관념적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미래사관과 변화사관이 그것입니다 (461).

ü         법치주의의 가장 발전된 형태가 관료제입니다. 관료 제도는 시스템에 의한 통치이기 때문입니다 (461).

ü         군주의 술치는 군주의 은밀하고 부정적인 권력이라기 보다는 관료제라는 새로운 제도의 작동 원리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법가를 다시 읽는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성과 법치주의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원리를 제도화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462).

ü         이사의 건의에는 다음과 같은 분서의 이유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지금의 것은 배우지 않고 옛것만 배워 당세를 비난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킨다는 것입니다. … 이사에게 있어서 분서갱유는 이러한 반혁명의 싹을 자르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65~6).

 

<강의를 마치며>

ü         관계론이라는 주제에서 본다면 불교를 다루어야 마땅합니다.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론은 그 자체가 관계론입니다 (471).

ü         불교에 관한 논의 이외에 또 한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송대의 신유학에 관한 것입니다 (471).

ü         동양고전 강독에서는 이 두 주제에 대한 논의가 빠질 수 없습니다. 불교 사상의 관계론 부분과 신유학의 사회적 관점을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472).

ü         불교 사상의 핵심은 연기론과 깨달음입니다 (472).

ü         불교 철학의 최고봉은 화엄 사상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의 본래 이름이 <대방광불화엄경>입니다. … 대는 절대적 대의 개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개념입니다. 방광은 글자 그대로 넓다는 뜻입니다. 공간적 의미로 풀이됩니다. 따라서 대방광은 크고 넓다는 뜻으로 불을 수식하는 형용사구가 됩니다. 그리고 불은 붓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대방광불이란 한량없이 크고 넓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붓다를 의미합니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이 붓다입니다. … ‘대방광불화엄경의 의미를 정리한다면 광대무변한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일고 풀이됩니다 (472~3).

ü         화엄이라는 의미에서 불교 철학의 핵심을 읽을 수 있으며 또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엄이란 꽃이 엄숙하다는 뜻입니다. ‘잡화엄식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 그러나 왜 이 세계가 고해가 아니고 꽃으로 장식된 화엄의 세계인가에 대하여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473).

ü         왜 고해가 아닌 화엄의 세계인가? 나는 그 비밀이 바로 대방광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방은 최고의 법치깅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473).

ü         만약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큰 것이고 충분히 넓은 것입니다. … 공간적으로 무한히 넓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474).

ü         불은 붓다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깨닫다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광대함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지요. 바로 연기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하지요. 작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돌 한 개라도 그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무한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는 바로 이 연기의 구조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붓다가 설하는 법이 바로 이 연기의 세계를 들어 보이는 것입니다. 연꽃을 들어 보이는 것이지요 (474).

ü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은 미물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한 세계를 상상해 봅시다. 한 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474).

ü         우리들이 지금까지 고전을 읽어온 기본적 관점이 바로 관계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입니다. 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 즉 각이란 이 연기의 망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 있는 분별지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 있는 집합 표상, 즉 업을 깨닫는 일입니다 (475).

ü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에 있어서 최고 형태는 바로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475).

ü         우리의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입니다. 칸트의 물 자체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물 자체라는 생각은 순전히 관념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으로서, 그것이 맺고 있는 전후방 연쇄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475).

ü         수많은 사건들의 극소수만이, 그 극소수의 극히 작은 부분들만이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들은 우리가 그 전체를 볼 수 없는 거대한 과정 위에서 생멸하는 작은 점들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작은 점들에 대해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성을 부여합니다. … 해체 철학의 논리가 바로 이러한 이식의 원천적 협소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정체성은 애초부터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분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작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의 긴 도정에 나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76).

ü         <벽암론>의 제2칙에서 조주 스님은 사람들에게 지도무난 유혐간택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도는 어렵지 않으며 오로지 간택을 경계할 따름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경우 간택이 바로 분별지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 우리 시대가 집단적으로 갇혀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를 깨트려야 하는 것입니다 (476).

ü         자본주의에 대한 의식의 변혁 없이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고전 읽기의 시작이며 그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77).

ü         불교 철학의 관계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적 이미지는 인드라의 그물입니다. 제석천의 그물망에 있는 구슬의 이야기입니다. … 중중무진의 영상이 다중 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의 참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477).

ü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계의 구조를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연기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 연기를 상생의 개념이라고 합니다. 연하여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연기를 보는 것이 바로 법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477).

ü         실체론적 존재가 아니며 관계론적 생성입니다. ..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지요 (478).

ü         현대 철학 특히 해체론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자기 해체적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본질은 오로지 관계 맺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현상은 이질적인 요소들의 잠정적 동거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해체론의 핵심 논점입니다. 이러한 해체론적 논의 구조와 비교해 볼 때 불교 철학이야말로 존재론에 대한 가장 과격한 해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78).

ü         모든 존재를 연기로 파악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를 연기처럼 무상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교 사상은 모든 생명과 금수초목은 물론이며 흙 한 줌, 돌맹이 한 개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의미를 부여하는 화엄학이면서 동시에 모든 생명의 무상함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화엄과 무상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이 불교 속에 있는 것이지요 (478).

ü         그런 점에서 불교 사상은 해체 철학의 진보성과 무책임성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책임성이라는 모든 존재의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존재의 의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지요. …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한 의미 부여가 거꾸로 모든 것을 해체해버리는 거대한 역설입니다 (478~9).

ü         세계는 화엄의 찬란한 세계이면서 동시에 덧없는 무상이 세계임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479).

ü         송대에 이르러 신유학이 등장하게 되는 까닭은 훈고학 일변도의 한나라 유학이 침첼르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 위진 남북조와 수당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와 도가가 유가를 압도하게 됩니다. 유학이 당시의 지적 관심과 요구에 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480).

ü         문명의 중심을 자처한 중화사상이 역사적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불교의 전래와 17세기 이후 서구 사상이 도입되었을 때라고 합니다. 그것은 중국 이외에 문명이 있다는 사실에서 받은 충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민족의 지배 기간인 원사와 청사마저도 각각 송과 명을 계승하는 정통 왕조로 규정하는 것이 중국의 중화주의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망이라 하지 않고, 도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망이라고 할 정도로 중화주의는 초민족적 세계관이며 문화주의적 세계관이었습니다 (481).

ü         중국이 불교에서 받은 충격은 이러한 중화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엄청난 것입니다. … 중국 이외에 다른 문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화주의적 세계관이 무너지는 충격인 것이지요. 불교 철학은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할 정도로 대단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 사상은 현실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481).

ü         특히 불교 사상은 개인주의적이며 반사회적인 해체 사상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신유학의 등장은 불교의 이러한 해체주의적이고 반사회적인 사상 영향으로부터 사회질서를 지키고 통일 국가를 만들어가야 하는 현실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481).

ü         그리고 송대 신유학과 관련된 논의 중에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송대 신유학에 이르러 비로서 유학의 철학화가 이루어졌다는 평가입니다 (482).

ü         불교는 한말의 혼란기에 중국에 유입됩니다 (483).

ü         중국 불교의 성립 과정은 수, 당의 통일 과정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수천태 당화엄이라는 중국 불교의 전형을 완성합니다 (484).

ü         수천태 당화엄이라는 승원 철학은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적 이데올로기이며, 지방 정권의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484).

ü         선종은 역사적으로 지방분권적 봉건 구조와 결합됩니다. 중앙의 지시와 간섭을 배제하는 해체적 본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근본에 있어서 무정부주의입니다. 일체의 제도적 규제를 거부하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선은 무교회주의와 상통하는 무조직, 무경전에 기반을 둔 각이요 불심입니다. 선종의 이러한 성격과 구조가 그 후 사원 경제의 몰락과 보시 체계의 와해, 그리고 만당의 혹심한 불교 박해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존속하게 되는 저력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한편으로 선종은 민초의 철학인 도가의 전통과도 더욱 밀접하게 상호 결합하게 됩니다 (485).

ü         이 선에 의하여 불교는 대중 종교가 됩니다. 선종 불교는 대중이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여러 층위의 내용을 벌여놓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대중에 대한 영향력에 있어서 막강한 권력으로 나타납니다 (485).

ü         송대의 신유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통일 국가를 재건하고 사회질서를 확립해야 하는 시대적 대응 과제의 일환으로서 등장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종교와 이성의 갈등기에 비종교적 엘리트들이 직면했던 고뇌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무정부적 상황은 당대 사회의 엘리트 계층에게 있어서 시급히 개변하지 않을 수 없는 매우 불안정하고 위험한 정치 상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485).

ü         <대학>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첫째 명덕을 밝히는 것, 둘재 백성을 친애하는 것, 셋째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를 3강령이라합니다. 그리고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가 8조목이니다 (487).

ü         <대학>은 일반적으로 대인, 즉 귀족, 위정자의 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학>은 단지 지식 계층의 학이라기보다는 당대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닞다 (487).

ü         송대 지식인들의 사회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불교적이고, 반도가적입니다. 불교의 몰사회적 성격에 대한 비판입니다 (487).

ü         <대학>이 선언하고 있는 것은 개인, , , 천하는 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의 수양과 해탈도 전체 체계를 구성하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488).

ü         <대학>은 와해된 사회 질서를 재건하려는 당대 인텔리들의 고뇌에 찬 선언이었다고 해야 합니다 (492).

ü         <대학>은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논리입니다. 이러한 체계적 논리의 최상에 놓여 있는 것이 명덕입니다 (492).

ü         <중용>은 당시의 사회적 과제를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는 텍스트입니다 (494).

ü         주자는 이 서에서 <중용>을 지은 목적이 무엇인가를 먼저 묻고 자답하기를, 자사가 도학의 전통이 끊어질까 봐 지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도학의 전통이 도통입니다. … 주자는 노불에 대한 견제 심리가 대단했으며 그것이 역설적으로 도통론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495).

ü         실학 선언이 바로 불교의 허학에 대한 유학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의 천명임은 물론입니다 (496).

ü         주자의 정신 세계는 철저하리만큼 사회적 동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99).

ü         중요한 것은 송대 신유학은 노불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해이해진 사회질서를 재건하기 위한 당대 지식인들의 지적 대응 과정의 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후 700년 동안 중국 사회는 물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사회적 모델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켜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확립된 구성 원리에 의하여 재건된 중국 사회는 명대 276, 청대 267년 동안 중국 사회를 관통하는 초안정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게 됩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서구 근대사회에 의하여 그것이 다시 한 번 도전받을 때까지 주자가 세운 도통은 확고한 사회 원리로서 굳건히 그 지위를 이어갔던 것이지요 (499).

ü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바로 그 견고하고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대응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지요. … 우리 나라의 경우도 조선 후기 성리학의 완고한 구조로 말미암아 사회 역량의 내부 소모와 전체 과정의 지체를 겪지 않을 수 없었음은 믈론 입니다 (500).

ü         명나라 중기에 신유학에 대한 비판 이론으로서 양명학이 소위 심학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501).

ü         신유학이 선종 불교에 대한 비판적 체계라면 양명학은 신유학에 대한 비판의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01).

ü         심론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주체성의 강조입니다 (502).

ü         모든 사회적 변화는 사상 투쟁에 의하여 시작되는 것이며 사회적 변화는 사상 체계의 완성으로 일단락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504).

ü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505).

ü         우리의 고전 독법은 관계론의 관점에서 고전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담론이었습니다. 이러한 담론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506).

ü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506).

ü         이것은 서구적 가치가 개인의 존재성을 강화하고 개인의 사회적, 물질적 존재조건을 확대하고 해방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과 구별됩니다. 서구적 가치는 인성의 고양보다는 개인의 존재 조건을 고양하는 것이며 그 존재 조건들 간의 마찰과 충돌을 합리적으로 규제하는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06).

ü         자본주의 체제가 양산하는 물질의 낭비와 인간의 소외, 그리고 인간 관계의 황폐화를 보다 근본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 당면한 문명사적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민화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상품 문화의 실상을 직시하는 것에서 비판 정신을 키워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비판적 성찰이 새로운 문명에 대한 모색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판적 성찰이 단지 성찰에 그치지 않고 근대사회의 존재론적인 구조에 대한 철학적 체계로 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체계적인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였을 경우에야 비로소 우리 삶의 도처에 자리 잡고 있는 감염 부위를 수시로 발견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연성은 우리의 시각을 여기의 현재에 유페시키지 않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친 전체적 조망과 역사 인식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507).

ü         동양고전의 독법에 있어서는 고전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는 이러한 성찰적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507).

ü         창의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갇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따라서 창신의 장에서는 개념과 논리가 아닌 가슴의 이야기와 , 이성이 아닌 감성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508).

ü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이라고 하였습니다. …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뜻입니다.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508~9).

ü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듯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509).

ü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언해둡니다 (509).

n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 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n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ü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510).

ü         이러한 정서와 감성을 기르는 것은 인성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최후의 방법입니다 (510).

ü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어주고,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합니다 (510).

ü         <시경>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시적 정서는 하나의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해줍니다. 공간적으로 상하좌우의 여러 지점을 갖게 해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춘하추동의 여러 시점을 갖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무엇과 어떻게 관계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511).

ü         시적 정서와 마찬가지로 서와 화의 영역 역시 풍부한 관계론의 담론을 보여줍니다. “서는 여라고 합니다. 서의 의미는 같다는 것이지요. … 그 사람의 미적 정서, 나아가 그 사람의 사상, 그 사람의 인격이 서에 고스란히 담긴다는 뜻이지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람과 서의 관계론입니다 (511).

ü         그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 ‘그림그리워함입니다. …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나아가 그림은 우리 사회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처럼 시와 문 그리고 서와 화라는 정서적 영역은 우리의 독법인 관계론을 확정하고 다시 그것을 인격화할 수 있는 소중한 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512).

ü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515).

ü         다른 식목자는 그렇지 않다. … 그 사랑이 지나치고 그 근심이 너무 심하여이렇게 하는 사이에 나무는 차츰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515).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철 스님의 주례사  (3) 2010.04.13
우리나라의 교조화 경향...  (0) 2010.02.22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2) 2009.12.18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1) 2009.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