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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11월의 나무 - 황지우

by 진규은규아빠 2009. 11. 13.
 
11월의 나무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測光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病名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 시인 황지우씨는 1952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서울대 인문대 미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沿革」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등을
『문학과지성』에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등장했다. 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다른 예술 장르에도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나타내 '조각전'(1995, 학고재화랑)을 열었으며, 미술평론가로도 활동중이다.
시집으로『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겨울ㅡ나무로부터 봄ㅡ나무에로』『나는 너다』
『게 눈 속의 연꽃』『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등과 시선집『聖 가족』을 상자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는 지금 ㅡ 이곳을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객관적인 삶의 이미지와 시인의 개별적인 삶의 이미지가 독특하게 겹쳐져 있는 특이한
시집이다. 슬픔과 연민, 정념들로 노출되는 시인의 사생활은 칙칙함이 아닌 투명성으로,
그리고 객관적인 삶의 풍경에는 개별 삶의 섬세한 주름들이 그대로 살아 어른댄다.
이는 시인의 '겹언어' 사용과 무대화 형식에서 오는 기법적인 긴장과 자신의 의식과
욕망의 뿌리까지 파고드는 철저한 시정신에서 오는 긴장이다.

어떻든 이번 시집은 황지우 시인의 시집들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우리 시사에서도 보기 드문 아름다운 시집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황지우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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